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부치 코이치 (문단 편집) == [[한신 타이거스]] 시절 == [[파일:external/m.sponichi.co.jp/G20140711008541230_view.jpg]] 최고의 배터리를 이루었던 동료 [[에나츠 유타카]](왼쪽)와 함께. 한신의 멤버가 된 타부치는 강한 어깨와 타격을 바탕으로 단박에 주전 [[포수]] 자리를 꿰찼고, 1969년 시즌 홈런 22개[* 본인의 백넘버랑 같다. 참고로 [[오승환]]의 한신 시절 등번호이며 그 이전에는 [[키도 카츠히코]], [[세키카와 코이치]] 등 포수의 번호로 잘 알려져 있었으나, [[후지카와 큐지]] 이후로는 마무리 투수의 등번호라는 인식이 강하다.]를 기록하는 장타력을 뽐내며 포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[[신인왕]]을 수상하는 경사를 누렸다. 이듬해인 1970년 8월 26일 [[히로시마 도요 카프]] 와의 경기 도중 상대 [[투수]] '''소토코바 요시로'''[* 1975년 [[사와무라상]] 수상자로 [[일본프로야구]] 역대 최다인 [[노히트 노런]] 3회(이중 [[퍼펙트 게임]]도 1회 포함되어 있다)를 달성한 투수이다.]의 투구에 왼쪽 관자놀이를 직격당해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으며 다음 시즌까지 말아먹는 횡액을 입었지만[* 이 사건 이후로 귀 부분까지 보호하는 [[헬멧]] 착용이 일반화되었다.], 1972년 [[오 사다하루|한발 타법]]으로 타격 폼을 바꾸며 그 해 홈런 34개로 화려하게 부활했고, 팀 [[에이스]]인 [[에나츠 유타카]]와 이른바 '''황금 배터리'''를 구축하며 멋진 콤비 플레이를 보였다. 그러나 프로 초기 [[콩나물]], [[기린]] 이라 불릴 정도로 호리호리한 몸매였던 타부치는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며 '''타부타'''[* タブタ, 부타는 [[일본어]]로 [[돼지]]라는 의미이다.] 라는 [[별명]]을 얻기도 했다.[* [[스타디움 히어로]] 에서 T팀의 타율 0.180, 홈런 50개의 대타인 타부타(タブタ)가 타부치를 [[모티브]]로 한 캐릭터이다.] [[파일:external/blog-imgs-58.fc2.com/tabuchi_22_imgdbc6faafzik3zj.jpg|width=350]] 이랬던 체구가... [[파일:external/www.mint-mall.net/e0045b31170cb3084d2f64de56bfe9aa.jpg|width=350]] 대략 이렇게 불었다. 아무튼 체중은 늘었을 지언정 타부치는 한신의 슬러거로 명성을 떨쳤고, 1972~1976년, 1978년 시즌 까지 매년 30개 이상의 [[홈런]]을 기록 하였으며(1977년엔 23개의 홈런을 날렸다), 1975년 에는 43개로 홈런왕 타이틀을 쟁취하며 [[오 사다하루]]의 14시즌 연속 홈런왕 장기 집권을 저지한 바 있다. 한편으로 1974년 시즌 도중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에 가보라는 [[가네다 마사야스]] 감독의 권유를 뿌리친 채 그날 경기에 그대로 출장하여 투런 홈런을 기록하는 [[근성]]을 선보인 적도 있다. 이렇듯 한신의 4번 타자로 맹활약하던 타부치 였지만, 뜻밖에도 1979년 [[세이부 철도]]가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를 인수하여 탄생한 [[세이부 라이온즈]]에 2대 4 대형 트레이드로 이적하게 되었다.[* 당시 세이부는 [[마유미 아키노부]], 다케노우치 마사시, 와카나 요시하루, 다케다 마사후미를 한신에 보내면서 타부치와 후루사와 켄지를 영입했다.] 이는 세이부 감독이던 [[네모토 리쿠오]]의 강력한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